요즘 드라마가 너무 자극적이라 지쳐가고 있다면, 혹시 그 피로감의 해답이 20년 전 작품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최근 OTT를 뒤지다가 우연히 2006년 MBC 드라마 〈궁〉을 다시 틀었는데, 첫 화면부터 예상치 못한 감정이 밀려들었습니다. 단순한 향수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봐도 충분히 볼 만한, 아니 오히려 지금이라서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보는 동안 내내 내 나이를 잠 시 잃어버리고 넉 놓고 보고 있었습니다.

황실판타지 설정
"대한민국이 입헌군주제 국가라면?" 이 질문 하나로 드라마는 시작됩니다. 입헌군주제(constitutional monarchy)란 왕실이 존재하되 실질적 통치는 의회와 정부가 담당하는 정치 체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영국처럼 왕은 있지만 대통령처럼 직접 통치하지는 않는 나라를 상상한 것입니다. 이 설정이 2006년 시청자들에게 먹혔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당시는 인터넷과 휴대폰이 막 대중화되던 시기였고,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얇아지던 시대였습니다. 평범한 여고생이 황태자와 결혼한다는 설정은 그 시대 10~30대 여성 시청자들의 감수성을 정확히 저격했습니다. 방영 당시 최고 시청률 27.1%를 기록했고, 2006년을 대표하는 트렌디 드라마로 자리 잡았습니다(출처: MBC 공식). 저는 그 시절 본방 사수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엔 황태자비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으니까요. 그런데 20년이 지나 다시 보니, 이 드라마가 잘 팔렸던 이유가 단순히 설정의 신선함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극 중 신채경(윤은혜)의 대사 방식, 당시 인터넷 유행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말투("대략 난감", "좌우지간")는 시청자들이 그 캐릭터를 자기 자신처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캐릭터 공감도를 극대화한 일종의 동시대적 리얼리티 효과였습니다. 다시 보면서 솔직히 개연성이 좀 흔들리는 장면이 많다는 건 인정합니다. 황실 호위가 너무 허술하고, 전 국민 생방송에서 이혼 얘기가 오가는 장면은 "왜 저러지?"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당시의 하이틴 로맨스 드라마 문법으로 받아들이면, 이 작품이 얼마나 장르 정체성에 충실했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촌스럽지 않은 영상미
제가 이번에 재 시청하면서 가장 놀랐던 건 연기나 스토리가 아니라 화면이었습니다. 2006년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색감과 공간 구성이 세련됐습니다. 제작진은 오산에 약 50억 원을 투입해 황실 세트장을 별도로 지었습니다. 이 세트는 색채 설계(color grading) 측면에서도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합니다. 색채 설계란 드라마 전체의 색조와 명도를 의도적으로 설계하여 감정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연출 기법을 말합니다. 전통 한복의 오방색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의상 색감, 기와지붕과 서양식 건물이 공존하는 세트 디자인이 조화를 이루면서 지금 봐도 눈이 피곤하지 않은 화면이 됐습니다. 실제 촬영지도 공간감을 살리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주요 촬영 장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운현궁·덕성여대 양관: 채경의 가례 장면과 동궁 배경
- 경주 동궁과 월지: 황실 가족 다과 장면
- 강릉 선교장: 두 주인공의 여름궁전 여행 시퀀스
- 삼청각: 황실 행사 및 외교 장면 다수
저는 보는 내내 배우들보다 세트와 배경을 더 자주 멈춰서 봤습니다. 경희궁 기와지붕 아래 역광으로 서 있는 황태자의 실루엣이나, 비 오는 날 중정(中庭, 건물 안쪽에 둘러싸인 마당)에 혼자 서 있는 채경의 모습은 지금 봐도 꽤 인상적입니다. 음악도 중요한 한 몫한 요소입니다. 퓨전 국악 그룹 '두 번째 달'의 OST는 황실이라는 공간에 고전적인 무게감을 더했고, HowL의 'Perhaps Love(사랑인가요)'는 이신과 채경의 감정선을 음악으로 설명해 줬습니다. OST(Original Sound Track)란 드라마나 영화를 위해 별도로 제작된 음악으로, 극의 감정 흐름을 보조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음악이 없었다면 영상미의 절반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재시청도 추천드립니다.
지금 이 드라마를 처음 접하거나 오랜만에 다시 보려는 분들에게 솔직하게 말씀드립니다. 20화 이후부터는 전개가 꽤 답답합니다. 드라마 연장 여파로 보이는 늘어짐이 있고, 인물들의 행동이 갈등을 위한 갈등처럼 느껴지는 장면도 있습니다. 이신은 좋아하면서도 표현하지 못해 상처만 주고, 채경은 자신이 선택한 결혼임에도 "나가고 싶다"며 반복해서 흔들립니다. 율(김정훈)은 채경을 향한 감정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만 지금 시각으로 보면 집착에 가깝습니다. 효린(송지효)은 자신이 거절해 놓고 뒤늦게 돌아와 관계를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미숙함을 보면서 이상하게 더 공감이 갔습니다. 열아홉 살의 사랑은 원래 저렇게 불완전한 것이니까요. 완벽하게 설계된 감정보다, 실수투성이에 충동적인 그 감정이 오히려 더 사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서사 구조 측면에서 보면, 이 드라마는 빌 뚱스로 만(Bildungsroman), 즉 주인공이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성장 서사의 전형적인 구조를 따릅니다. 빌 뚱스로 만 이란 원래 독일 문학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주인공이 사회와의 충돌 속에서 내면적으로 성숙해 가는 서사 방식을 말합니다. 채경이 황실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그 구조입니다. 한국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의 서사 유형을 연구한 여러 미디어 연구자들도 〈궁〉을 2000년대 중반 하이틴 로맨스 장르의 분기점으로 평가합니다. 이후 제작된 대체역사 설정 드라마나 가상 황실 배경 작품들이 이 드라마의 문법을 많이 따랐다는 점에서, 장르가 문화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다시 보고 싶다면 Wavve, iMBC 공식 홈페이지, Apple TV에서 다시 보기가 가능합니다. 특히 초반 10화까지만이라도 한번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영상미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습니다. 완성도 높은 정치 로맨스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시절 우리가 꿈꿨던 설렘의 질감을 가장 선명하게 담은 작품이라는 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드라마가 무료하거나 요즘 콘텐츠에 지쳐있다면, 2006년의 기와지붕 아래로 한번 돌아가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결말은 이미 알고 있어도, 그 과정의 온도는 처음 보는 것처럼 보는 내내 흥미로웠습니다. 추억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쯤 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