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를 보면서 화가 난 적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tvN 드라마 스타트업을 다시 정주행 하면서, 가슴이 먹먹해지다가 어느 순간 묘하게 화가 치밀었습니다. 아름다운 성장 이야기를 보고 있는데 왜 화가 났는지, 그 이유를 쓰고 싶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
나비효과 인 줄거리
스타트업은 2020년 10월부터 12월까지 tvN에서 방영된 16부작 드라마입니다. 지금은 티빙(TVING)과 넷플릭스에서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연출은 오충환 감독, 극본은 박혜련 작가가 맡았고, 배수지, 남주혁, 김선호, 강한나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줄거리의 출발점은 의외로 소박합니다. 비 오는 날 갈 곳 없는 고아 소년 한지평을 거둬준 할머니 최원덕 여사가, 상처받은 손녀 서달미를 위해 신문에서 읽은 수학 천재 '남도산'의 이름을 빌려 가짜 펜팔 편지를 대신 써줍니다. 이 선의의 거짓말이 15년 뒤 거대한 나비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드라마의 진짜 묘미는 로맨스보다 이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다가 결국 수습되는 쫄깃한 과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인이 된 주인공이 꿈에 그리던 '남도산'을 찾아갔더니, 매일 코딩만 파는 모태솔로 너드남이 나타나는 장면에서 저는 혼자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배경이 되는 '샌드박스'는 한국의 실리콘밸리를 표방한 창업 육성 공간입니다. 여기서 샌드박스(Sandbox)란 원래 IT 업계에서 외부 시스템에 영향을 주지 않고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격리된 테스트 환경을 의미합니다. 개념을 차용해,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안전한 창업 생태계를 상징적으로 담아냈습니다. 드라마 단어 자체도 이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스타트업(Startup)이란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을 기반으로 빠른 성장을 목표로 하는 초기 창업 기업을 의미합니다. 드라마 제목이 이 단어를 선택한 건, 청춘의 시작(START)과 성장(UP)을 동시에 담겠다는 의도였을 겁니다.
청춘, 보여주지 않은 현실
솔직히 고백하면, 저는 처음 이 드라마를 볼 때부터 조금 불편했습니다. 화면 속 청춘들은 고난 속에서도 빛났고, 실패조차 드라마틱하게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면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얼굴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에 이력서를 수십 장 써도 답장 한 통 없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면접에서 떨어진 날이면 내 능력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시대가 어려운 건지 도무지 구분이 안 됐습니다. 그때 누군가 제게 "헝그리 정신이 부족한 거 아니야?"라고 했다면 저는 더 깊이 움츠러들었을 것입니다. 2023년 기준 청년(15~29세) 실업률은 5.9%였지만, 체감 실업률에 해당하는 청년 고용보조지표 3(확장실업률)은 19.7%에 달했습니다(출처: 통계청). 여기서 고용보조지표 3이란 공식 실업자에 더해 취업 의사가 있으나 포기한 사람, 불완전 취업자까지 포함한 수치로, 실제 청년들이 체감하는 고용 한파를 훨씬 현실적으로 반영합니다. 작품 속 몇십억 단위 투자와 데모데이 장면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한 것도 사실입니다. 데모데이(Demo Day)란 스타트업이 투자자들 앞에서 자신의 사업 아이디어와 프로토타입을 발표하는 행사로, 실제로는 수개월간의 준비와 수십 번의 피드백 수정을 거쳐야 하는 혹독한 과정입니다. 드라마는 그 긴장감을 단순화했고, 스타트업 업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우려의 시선이 나왔던 것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 드라마는 현실을 재현하려 한 게 아니라, 가능성을 상징하려 했던 건 아닐까. 적어도 화면 속에서만큼은 한 번쯤 성공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하고요. 지금의 청춘에게 필요한 것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제도적 안전망
- 스펙이 아닌 가능성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
- "왜 못하느냐"가 아닌 "잘 버티고 있다"는 말 한마디
그 어떤 것도 청춘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걸 알면서도 "노력하면 된다"는 말을 쉽게 내뱉는 건 비겁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장서사, 진짜 배운 것
드라마는 결국 수지와 도산의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도산은 실리콘밸리에서 3년간 성장해 돌아오고, 두 사람은 자율주행 기술 입찰에 성공하며 유니콘 기업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기서 유니콘 기업(Unicorn Company)이란 기업 가치가 10억 달러(약 1조 원) 이상인 비상장 스타트업을 의미하며, 신화 속 유니콘처럼 희귀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뼛속까지 지평파였습니다. 뒤에서 키다리 아저씨 노릇만 하면서 정작 자기감정에는 용기를 못 내는 한지평을 보면서, 모니터를 부여잡고 얼마나 답답해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평이가 했던 말 하나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에게만 쓴소리를 한다"는 철학이었는데, 제 경험상 이건 정말 맞는 말입니다. 내 사람이라서, 내가 책임지는 사람이라서 모진 소리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결말에서 지평은 사랑을 이루지 못했지만, 보육원 출신 청년들을 돕는 엔젤 투자자(Angel Investor)로 새 출발 합니다. 에인절 투자자란 초기 스타트업에 자금을 투자하는 개인 투자자를 의미하며, 위험을 감수하고 가능성에 베팅한다는 점에서 이름 그대로 '천사' 같은 역할을 합니다. 지평의 선택이 자신이 걸어온 길의 연장선이라는 점에서, 저는 이 결말이 오히려 더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2020년 드라마 방영 당시 청년 창업 지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소벤처기업부의 창업 지원 예산은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였습니다(출처: 중소벤처기업부). 드라마가 K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한 측면은 분명 있다고 봅니다. 다시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건 최원덕 할머니의 얼굴이었습니다. 화려한 성공이나 멋진 피칭 장면이 아니라, 주름진 손으로 편지를 쓰던 그 다정함이요. 저도 나이가 들수록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팍팍한 현실에 치이다 지쳤을 때, 무해한 사람들의 치열하고 따뜻한 이야기가 보고 싶을 때 드라마 스타트업을 권합니다. 단, 보면서 화면 속 청춘과 현실의 청춘을 가끔 함께 떠올려 주신다면 더 좋겠습니다. 파도가 높아서 파란만장한 것이 아니라, 푸르러서 파란 청춘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