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에서 새로운 드라마를 틀어놓고 "그냥 배경음으로나 켜두지 뭐" 하다가 어느새 새벽 두 시가 된 경험, 한 번쯤 있으시지 않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처음 원더풀스를 켰을 때만 해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다 보고 나서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이건 단순한 초능력 코미디가 아니었습니다. 혼자 보다가 얼마나 웃었는지 박은빈 연기 정말 잘합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도 그렇지만 요번 연기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원더풀스 1999년 세기말 배경의 초능력 설정
드라마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느꼈던 건, 이 작품이 시대적 배경을 단순한 레트로 감성 도구로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해성시라는 가상 도시에 깔린 Y2K의 불안감, 그러니까 컴퓨터가 1999년 12월 31일 자정을 넘기는 순간 오작동을 일으켜 사회 시스템 전체가 마비될 수 있다는 종말론적 공포, 그게 단순한 배경 장식이 아니라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였습니다. Y2K 버그란 연도를 두 자리 숫자로 처리하던 컴퓨터 시스템이 2000년을 1900년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기술적 오류를 말합니다. 지금 들으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당시는 은행 전산망부터 군 시스템까지 이 문제가 진지하게 다뤄졌습니다. 실제로 각국 정부가 대응 예산을 대규모로 편성했을 만큼 사회 전반의 불안이 컸습니다(출처: 한국인터넷진흥원). 그 불안의 공기를 꽤 정교하게 복원합니다. 오래된 간판, 삐삐, 촌스럽지만 정겨운 골목. 촬영지인 인천과 안산 일대의 옛 분위기가 남아 있는 장소들이 1990년대 말의 질감을 만들어내는 데 실제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드라마는 레트로(복고풍 미학)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레트로를 통해 "그 시대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불안"을 되살리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안이 초능력 설정과 절묘하게 맞닿습니다. 세상이 곧 끝날 것 같던 시대에, 이미 인생이 끝나버렸다고 느끼던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능력을 얻게 된다는 구조. 저는 이 설정이 단순한 장르적 장치가 아니라 꽤 의도된 서사 설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원더풀스에 등장하는 능력들은 사실 처음 볼 때 좀 당황스럽습니다.
- 심장이 빠르게 뛰어야만 발동하는 순간이동
- 짜증이 극에 달해야 쓸 수 있는 괴력
- 거짓말을 하면 몸에 무언가가 달라붙는 접착 능력
- 쓸 때마다 코피가 터지는 염력
멋있기는커녕 쓸 때마다 몸에 무리가 오거나 감정 상태에 의존해야 하는 능력들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완전무결한 히어로가 아니라, 자기 능력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어설픈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사람 냄새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에는 차은우 때문에 보기 시작한 부분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드라마를 보다 보니 이 작품을 끌고 가는 건 특정 주인공 한 명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캐릭터 구성을 보면 이렇습니다. 심장병으로 죽음을 옆에 끼고 살아온 은채니, 규정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원칙주의자 공무원 이운정, 세상의 음모를 혼자 다 알고 있다고 믿는 손경훈, 엄청난 괴력을 가졌지만 정작 본인은 세상에서 제일 순한 강로빈.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은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캐릭터 앙상블(Character Ensemble)이란 여러 등장인물이 각각 독립적인 서사를 가지면서도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구성 방식을 말합니다. 이 드라마는 앙상블 구성을 꽤 잘 활용하고 있는데, 주인공 한 명에게 집중하는 대신 각 인물의 결핍이 서로를 필요로 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손경훈과 강로빈이었습니다. 처음엔 코믹 서브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보다 보면 이 두 인물이 가장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손경훈은 세상에 인정받지 못해서 음모론에 매달리는 사람이고, 강로빈은 무시당하면서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저는 이 캐릭터들을 보면서 "살면서 한 번쯤은 저런 감정 느껴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이 드라마가 가진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반부에서 드라마가 원더킨더 실험과 하원도의 음모를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분위기가 어두워집니다. 원더킨더 실험이란 드라마 속 세계관에서 초능력을 가진 인간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거나 통제하려 했던 비밀 프로젝트를 말합니다. 이 설정이 묘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진 이유는, 실제 역사 속에서도 인간 강화나 우생학적 실험이 자행된 사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심리 조작 프로그램인 MK울트라 실험 등이 공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출처: 미국 중앙정보국(CIA) 공개 문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어쩌면 어딘가에서 이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K-히어로물이 아닌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박은빈과 차은우라는 이름값, 유인식 감독의 연출력, 허다 중 작가의 리드미컬한 대사 모두 중요하지만, 결국 이 드라마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건 캐릭터 한 명 한 명이 살아있다는 감각입니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원더풀스의 핵심 관전 포인트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결함투성이 초능력 설정이 만들어내는 인간적 코미디
- Y2K와 IMF 이후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녹인 시대적 현실감
- 주인공이 아닌 팀 전체가 살아있는 앙상블 구성
원더풀스는 저도 처음 기대를 낮게 잡았다가 예상보다 훨씬 오래 마음에 남은 드라마입니다. 웃기다가 먹먹해지고, 허술한데 어느 순간 그 사람들이 보고 싶어지는 작품. 넷플릭스에서 볼 드라마를 고르고 있다면, 일단 첫 화를 끝까지 보시길 권합니다. 1화가 끝나는 시점에 이미 멈추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꼭 한번 보시고 웃음 한번 웃고 가볍지만 그래도 있을 법한 현실의 실험들 하지만 따뜻한 서로의 사랑을 보여준 드라마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