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부부의 세계 (심리멜로, 복수서사, 열린결말)

by 드라마 방구석 2026. 5. 1.
반응형

김희애와 박해준 두 주인공 생각하는 사진
김희애와 박해준 두 주인공 생각하는 사진

 

솔직히 처음엔 그냥 자극적인 불륜 드라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서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화면은 끝났는데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느낌, 오히려 그때부터가 시작처럼 마음속에서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 경험이 이 글을 쓰게 만든 이유입니다. 5월의 가정의 달에 내가 선택한 드라마가 좀 이상하겠지만 그래도 보다 보니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지 알 거 같았습니다.

불륜극이 아니라 심리멜로

일반적으로 불륜을 소재로 한 드라마는 권선징악 구조로 마무리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나쁜 남편은 응징당하고, 피해자 아내는 새 삶을 찾고, 시청자는 통쾌함을 얻는 방식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런 흐름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부부의 세계는 그 기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배반합니다. 장르는 심리 스릴러(psychological thriller)입니다. 심리 스릴러란 외부적 사건보다 인물의 내면 심리와 감정 변화를 주된 긴장감의 원천으로 삼는 장르를 의미합니다. 총격이나 추격이 없어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방식이 바로 이 장르의 특성입니다. 부부의 세계는 이 공식을 가장 잘 구현한 한국 드라마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지선우(김희애)가 남편 이태오(박해준)의 옷에서 발견한 머리카락 한 올에서 시작됩니다. 이 단서 하나가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장면은, 제가 직접 본 수많은 드라마 오프닝 중에서도 가장 서늘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더 큰 충격은 주변 친구들까지 외도 사실을 알고 침묵하고 있었다는 설정이었습니다. 배신은 남편 한 사람이 아니라, 지선우가 믿었던 인간관계 전체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방영 기간인 2020년 3월부터 5월까지 JTBC 금·토 밤 시간대를 강타했으며, 비지상파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을 경신했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 시기 OTT 및 본방 시청 수요가 동시에 급증한 드라마로 부부의 세계가 상위권에 기록되었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복수서사 공허함

저는 처음 볼 때 지선우가 완벽하게 복수하고 행복해지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고 나서야 이 드라마가 복수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복수는 통쾌함이 아니라, 철저히 파괴적인 감정으로 묘사됩니다. 드라마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이 바로 감정의 전이(emotional displacement)입니다. 감정의 전이란 특정 대상을 향한 분노나 고통이 해소되지 않고, 주변의 다른 관계로 옮겨가며 상처를 확산시키는 심리적 현상을 말합니다. 지선우와 이태오의 갈등이 아들 준영에게로 전가되는 과정이 이 드라마에서 가장 불편하면서도 현실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부모의 싸움이 아이에게 어떤 형태의 상처를 남기는지, 이 드라마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품을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이태오라는 인물도 단순한 악역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다정한 남편이지만 내면에는 인정 욕구와 성취에 대한 집착이 가득한 인물, 외도가 드러난 이후에도 끝까지 자기 합리화를 멈추지 않는 태도. 분명 잘못된 인간인데, 그 감정의 흐름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무서웠습니다. 여다경(한소희)의 결말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외도 상대를 악역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제 경험상 이 드라마는 그 시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다경은 자신이 믿었던 사랑이 허상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떠나는 인물입니다. 욕망과 불안을 동시에 가진, 가장 현실적인 탈출을 선택한 캐릭터로 읽혔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각 인물이 맞이한 결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지선우: 복수에는 성공했지만 가장 소중한 아들을 잃은 채 홀로 남겨집니다.
  • 이태오: 사회적 지위, 가족, 재산 모두를 잃고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합니다.
  • 여다경: 이태오와 이혼 후 새로운 삶을 선택해 떠납니다.
  • 이준영: 부모의 싸움에 지쳐 가출하고, 1년 만에 돌아오는 장면으로 열린 결말을 맺습니다.

열린 결말의 기억

부부의 세계 결말은 명확한 해피엔딩도, 완전한 파멸도 아닙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누군가 돌아오는 소리를 듣고 지선우가 문밖으로 나가는 장면, 그것이 준영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바람이었는지 드라마는 끝내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 열린 결말(open ending)이라는 기법은, 시청자에게 이야기의 해석 권한을 넘기는 서사 방식입니다. 완결된 결말보다 오히려 더 오래 잔상을 남기고, 각자의 삶에 빗대어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효과적입니다. 저는 처음 볼 때 이 결말이 허무하게 느껴졌는데, 다시 보니 오히려 이 드라마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마무리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계의 상처는 그렇게 깔끔하게 봉합되지 않습니다. 복수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고, 그 이후의 이야기가 어쩌면 더 어렵습니다. 이 작품이 결말 이후로도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인물들에게 감정 이입이 된 상태에서 그다음 삶이 궁금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작인 영국 BBC의 닥터 포스터(Doctor Foster)와 비교해 봐도, 한국판은 인물 간 감정선의 밀도를 훨씬 높이고 아이에게 전가되는 상처를 더 전면에 드러냈다는 점에서 리메이크가 아니라 독립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영국 BBC는 원작 드라마의 심리적 사실주의(psychological realism)를 핵심 가치로 꼽았으며, 한국판은 그 기반 위에서 훨씬 농도 짙은 감정극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출처: BBC). 이 드라마를 재정주행하거나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통쾌함을 기대하기보다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시선으로 보시기를 권합니다. 특히 결말 부분에서 준영의 존재에 집중해 보시면, 이 드라마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더 선명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현재 TVING, 넷플릭스, 왓챠 등 주요 OTT에서 시청 가능하니 다시 한번 확인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참고: https://blog.naver.com/valorground/224231595323

반응형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